티스토리 뷰

0410, 23:00 - 23:30

페페이 2019. 4. 10. 23:32

 


  아이가 되짚을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희뿌연 연기로 가득찬 방이었다. 창문이란 창문은 모두 나무판자를 덧댔는데, 그조차 부족하다는 듯 가시달린 철사로 칭칭 동여져 있었다. 그럼에도 얕은 틈을 비집고 들어온 희미한 빛살이 허공을 떠돌았다. 아지랑이처럼 꾸물대는 무형의 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가로막힌 창 너머에서 작은 소리들이 들렸다. 속삭이며 웃음짓는 소리들은 이따금 볕을 휘저으며 유리창을 두들겼다. 지금의 아버지보다 더 젊고 수척한 인상의 남자는 선잠을 자다가도 퍼뜩 몸을 일으키며 그 무언가들을 쫓아내듯 수차례 발을 굴렀다.
  방 한 켠에는 잘 마른 장작과 이름 모를 꽃들이 창가보다 높게 쌓여있었다. 다만 익숙한 향이었고, 어렴풋이 방 안을 메운 연기에서 맡았으리라 추측한다. 드물게 마르지 않은 그것들을 본 것은 이 때가 마지막이었다. 언젠가 아버지께 이에 대해 물었지만 그는 말없이 아이를 끌어 안고선 이제는 필요 없는 것들이란다, 자상하지만 어딘가 불안한 목소리로 답했다. 확신없는 단언이었다. 단지 그렇게 믿고 싶을 뿐인, 스스로를 위한 위로의 말. 아이는 그가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다 여겼다. 또한 그 무언가는 자신과 아주 밀접하게 관련된 과거의 일이었을 것이라 조심스레 짐작했다. 그리고 아마 그는 아이가 잊었으리라 판단한 무렵의, 아주 어릴 적에 자신을 찾아왔던 웃음소리들도 어쩌면 관계있을지도 몰랐다. 그 소리들은 종종 아이를 찾아오는 짓궂은 손님들의 웃음소리와 똑닮아있었으므로. 어찌되었든, 봄처럼 상냥한 아이는 그 이상의 이야기를 묻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그저 조용히 속삭이며 염려많은 남자의 등을 마주 안았다.

 

 

 

 

 


Sophie Hutchings - Wide Asleep
https://youtube.com/watch?v=McL2IpA_OpE

 

 

 

'' 카테고리의 다른 글

0413, 23:00 - 23:35  (0) 2019.04.13
0412, 23:00 - 23:35  (0) 2019.04.12
0409, 23:13 - 23: 56  (0) 2019.04.09
0408, 23:00 - 23:30  (0) 2019.04.08
0407, 23:00 - 23:30  (0) 2019.04.07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TAG
more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