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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23:00 - 23:30

페페이 2019. 10. 6. 23:31

 


  상실을 추모하며 고개 숙인 이는 완연한 겨울이다. 제 어미와는 다른 어떤 무채색. 마마는 손 대면 따스하게 녹아 스미는 눈 같은 사람이었지만, 당신은 작은 온정 하나에도 위태하게 바스라지면서 굳건한 체를 한다. 메마르고 창백한 회벽의 색. 알고 있다. 당신의 깊숙한 곳에서 축이 되었던 자는 아주 오래 전에 부숴졌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당신은 아무렇지 않으려 들었고 친족들은 그렇기에 당신을 방관했다. 반려를 잃은 자의 애상이란 무릇 낙인과 같은 것이었으므로. 당신 같이 무른 이에겐 그가 더없는 구원이자 낙원에 가까웠으리라. 나이를 탓하기엔 부쩍 왜소해 보이는 당신의 등을 여상한 낯으로 쓸어낸다. 매년 이맘때면 선명해지는 그의 앳된 얼굴, 이름자, 그리고 그를 회고하며 떨리는 손에 얼굴을 묻는 당신. 가엾은 나의 대부, 나의 삼촌. 당신이 이 값싼 위로에 웅크린 어깨를 내게 기대는 게 참 좋아. 당신은 모를테지, 사랑스러운 나의 라몬. 집안 사람이라면 한 번씩 누구든 좋을 것처럼 굴며 전부 다 퍼줄 것같아 겁이 난다는 말을 하곤 했지만 당신만은 그러지 않았다. 그럴 수 밖에. 제게 있어 전부는 처음부터 당신이었고 당신은 그걸 알면서도 암묵했다. 좀 더 나이가 들면, 좀 더 괜찮은 사람을 만나면. 부드럽게 타이르던 말은 결국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돌아서며 무겁게 걸음을 옮기는 당신을 본다. 나이에 비해 풍채는 젊었을 적을 잊지 않았지만 수척해지며 색을 잃어가는 당신. 분명 제가 태어난 건 당신이 잃어버린 색을 돌려주기 위함일 테다. 당신의 손을 맞잡는다. 서늘하게 와닿는 약지의 금속을 모른 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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