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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이름을 불렀던 것 같은데. 사내는 잠시 멈춰서 뒤를 돌았으나 그가 걸어온 길 위에는 응당 아무도 없었다. 걸음 소리도 없고 그림자조차 없다. 그의 존재마저 부정하듯이 미온의 볕만이 무겁게 가라앉은 길은 괴괴하다. 언제부터 걸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끝이 있는 지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사내는 지친 발을 하염없이 옮기며 검은 해를 향해 걸어간다. 낮게 부유하며 야트막한 능선에 무거운 몸을 괴인 그것은 마치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입구처럼 보였다. 이 길이 끝나면, 저 끝에 도달하면. 처음에는 헤아릴 수 없는 상념과 잔념들이 뒤엉켜 포화상태였지만 지금은 그 집념만이 오롯하게 남았다. 그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오로지 그 하나 뿐이다. 그러다 제 자신마저 잊어 정말로 길 위에 아무도 남지 않는 순간이 오면, 불현듯 멈춰 선 사내는 우두커니 제 뒤를 살폈다. 그 홀로 남은 이 길에서 빈 눈으로 누군가의 잔상을 찾았다. 뭔가 잊은 것 같아. 핏자국마냥 붉고 선명하게 이어지며 좀체 흐려질 줄 모르는 이 길 위에는 사내 뿐임에도, 아니, 길 위에는 아무도 없다. 자신을 잊어버린 빈 껍데기 같은 사내가 미련 속에 붙박혀 있을 따름이다. 속죄를 구하는 것이 두려워 백치를 자처한 어리석은 자만이 남아있다. 빛을 잃고 검게 죽은 눈, 한 때는 그가 사랑했던 어떤 이의 따스했던 흔적은 그저 공허하다. 사랑해 마지 않던 이가 선사한 배신의 관을 쓰며 죽어간 자는 원망마저 잊은 채 슬픔에 고개를 누인다. 그래요, 내 사랑, 이 너머에 내가 있어요. 나를 봐요, 나를 보러 와요. 당신 손으로 앗아간 당신의 짓밟힌 낙원을. 섧게 피 흘리는 이는 사내에게 끝없이 속삭이지만 그는 아무 것도 듣지 못했다. 그저 이따금씩 돌아 서 자신의 이기를 주워 섬겼다. 누군가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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