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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 선 펜 끝에 잉크가 번진다. 불현듯 치밀어 손 끝이 식어가는 감각은 불안이라 명명된다. 기실, 데보라 크레메르는 생에 있어 단 한 번도 글을 써본 적이 없는 탓이다.
주변 이들은 그를 가리켜 활자 중독이라 입을 모았으나 기껏해야 일기장의 몇 줄이나 낱장의 편지들이 고작이다. 누구에게도 펼쳐 보인 적 없고 부치지도 못하여 아무도 읽지 못한 문장들은 언제나 서랍 한 구석에 몸을 웅크린다. 이는 현재에 이르러서도 그리 달라지지 않은 성질 중 하나였다. 항시 책장 밖 여백에 존재하며 온갖 저술을 탐식하는 자는 아이러니하게도 타자의 기억 속에서 망각으로 머물기를 바랐다. 잊을 수 없다면 잊혀지면 그만이다, 그들과 함께. 억지로 삼켜 견뎌낸 논리란 눈꺼풀과 혓바닥에 각인된 얼굴들과 이름자들에 기인한다. 다시금 인간의 육신을 빌어 땅을 딛기에는 죄 많은 행보임에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흰 깃을 가다듬으며 그분의 고결한 의사를 대변하는 사자께서는 요람에 잠겨 칭얼이는 존재를 그저 잠재울 뿐 지나쳐온 생들을 거두지 않았으므로 이는 오롯이 견뎌 마땅한 업일 테였다. 굽어 살피는 안온을 벗어나 울타리 너머를 배회하던 어린 양에겐 그렇게 지난 날의 후회와 미련을 새로이 짊어질 기회를 받았다. 다만 그의 나이 열 일곱이니, 도합 여든의 삶이란 제법 신선하게 신물이 나는 법이었다.
그러므로, 일종의 반발심과 태반의 두려움, 일말의 거부감이나 방황 따위가 뒤엉긴 한탄은 백지로 남는다. 갈피를 잃고 만다. 때때로 이름을 불리우면 제 것인 줄 모르고 한박자 늦게 뒤돌아본 그 너머의 풍경처럼. 이따금 막연히 시야 한 켠이 어찔해오는 순간이 있다. 이름 모를 현기증은 병열을 동반하며 겁에 질린 몸뚱이에 비명을 대신해 스민다. 내지르지 못한 응어리들은 무른 살갗을 벌겋게 물들인다. 보다 어릴 무렵에는 제 여물지 않은 손마디가 그렇듯 오래토록 무언가를 움켜쥐는 것이 사무치게 괴롭고 외로워 한참을 울어버린 날도 있었다. 쉬고 갈라져 누구도 알아듣지 못하게 되어서야 입에 올려 헤아리는 그들을, 흘려보내야 옳음을 알면서도 멎지 않는 눈물 같이 차올라 베개맡에 얼굴을 묻고 과거의 잔재들로 젖어가던 밤. 이제는 헛된 망령으로 치부하면서도 쉬이 놓지 못하는 까닭과 농담도 되지 못할 그 기억들을 익명의 허구삼아 늘어놓지 못하는 까닭은 다르지 못하고 꼭 닮아버린 그런 나날들의 연장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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