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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부터 잘못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이것이 ‘잘못’으로 분류되는 이유조차 납득할 수 없었다. 피험 대상의 진행 거부? 대상의 부적응은 사전에 염두하고 있던 바였다. 실험은 전제부터 강제성을 띠고 있었고 이는 대상의 의사를 전면 배제했다. 하지만 그 외의 방법으로는 성립될 수 없는 실험이었다. 그도 그럴게 그 대상이란 이미 5년 전에 사망한 자신의 손녀였으므로.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죽은 아이는 인내심과 이해심이 많았다. 소위 애늙은이라 불리는 부류에 가까워 또래들 사이에 두고 비교하자면 퍽 의젓하고 관용 있게 굴 줄 알았다. 문제가 있다면 첫 번째, 아이들은 쌍둥이로 태어났으며 두 번째, 다른 아이는 외관을 제외한 모든 면에 대해 죽은 제 자매를 전혀 닮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상처 입은 짐승처럼 앓아대는 낯짝이 볼썽사나울 정도로 엉망이었다. 감정은 본래부터 복잡한 축에 속했지만 제 남은 손녀가 구사하는 슬픔은 한층 더 난해했다. 현재 감정선의 가장 큰 축은 두려움이다. 미안함이 그 다음으로 비중을 차지하고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사고의 중심에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자리하고 있다. 혼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의존적 불안, 기형적임을 알면서도 과거의 안온하던 관계로 돌아가고 싶다는 도피성 집착, 자기 보호가 지나친 나머지 반발적으로 굳어버린 인간 불신, 이로 하여금 충족될 수 없는 애정결핍, 그런 따위를 총망라하는 이기심이 공포로 변질되는 것이다. 덜덜이며 흐느끼는 마른 입가에 잇자국이 선명하다. 너덜해진 입술로 읊조리는 절망 중에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라고는 자매의 이름뿐이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숭앙. 절대자였던 구세주의 갑작스러운 부재는 이리도 손쉽게 파국으로 치닫는다. 성가시기 짝이 없다.
이젠 영 예전 같지 않은 눈가를 문지르고 있자니 일순 상이 두 개로 흐려지다 만다. 진보하는 기술은 충분히 인류를 영생의 길로 끼워 맞추고 있었지만 적어도 당장의 제겐 해당하지 않는 일이어서, 부엌으로 발을 옮겼다. 남아있다 한들 제대로 된 위로를 할 수 있을 리 없거니와 그래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탓이다. 저 가여울 만치 애상에 잠긴 혈육은 한 번 울음을 터뜨리면 제 둘도 없는 쌍둥이가 달래기 전까진 도무지 그칠 기미가 없었다. 그리고 항상 기꺼이 그 뒤치다꺼리를 도맡아온 아이는 지금 없다. 그래, 문제란 문제는 전부 그 아이의 죽음으로 귀결되었다. 처음부터 납득할 수 없는 잘못이란 이 사실이었는지도 몰랐다. 망자의 존재에서 죽음을 부정하기 위해 소생을 시도한다지만 과정을 거듭하고 실패를 거듭할수록 지울 수 없는 사실은 더욱 더 선명해질 테였다. 앞으로 몇 번을 더 반복해야 성공할 수 있을지, 그마저도 당사자들이 납득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제가 더 살아봐야 고작 수년에 지나지 않을 터였으니 그 이후의 일들은 저 어린 것이 홀로 감당해야함은 자명했다.
저러다 탈수로 쓰러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칠 줄 모르는 흐느낌을 뒤로 한다. 기껏 이룩한 것들이나 포기하지 않으면 다행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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