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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아이는 답지 않게 홀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진탕 취해있었다. 제 또래라기엔 조금 연상으로 보이던 낯선 사람에게 업혀 잠에 들었나 싶다가도 퍼뜩 고개를 들며 아무 것도 신지 않은 양 발을 까딱거렸다. 처음 보는 모습보다 제가 길러냈음에도 수년간 한 번을 보지 못한 허물없는 아이의 행동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내가 없는 곳에서는 평범하게 다른 사람들처럼 지내고 있었구나. 진심으로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그 조건에 제 부재가 전제된다는 사실을 체감하자 꼴사납게도 눈가에 열이 고이기 시작한다. 서머, 정신 차려. 서머.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어깨가 움츠러든다. 저가 아닌 제 아이의 쪽일 게 분명한데. 왜 자꾸 불러요, 선배. 얕게 키득이며 점점 더 느슨해지는 아이의 표정이란 한없이 나긋했다. 느릿히 떠낸 눈꺼풀 아래로 새카만 시선이 밤하늘처럼 고인다. 가만한 검은자위가 흔들림 없이 곧게 선배라는 사람을 비춰낸다. 그 또한 고요히 이를 마주할 뿐이었다. 직감적으로 둘의 관계가 일반적인 동료 이상임을 깨닫자 무어라 말하기 힘든 불안이 목 아래로 스멀거리기 시작한다. 관여하고 싶지 않은 사생활을 목격한 껄끄러움이라기엔 보다 개인적이고 질이 나쁜, 그래, 내 것을 빼앗았다는 적대감과 사실 소유권조차 진즉에 잃은 자의 초라한 질투심이다. 어수선하다 못해 어지러워지는 시야를 손끝으로 짓눌러 억지로 감아낸다. 그래선 안되었고 그럴 자격도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자리를 피해주는 정도겠지. 애써 담담히 돌아서려던 차였다.
네 아버지가 보고 계셔, 서머. 일순 느리지만 유유히 흐르던 모든 시간들이 얼어붙었다.
“…건들지 말고, 말 걸지 말고. 아무튼…, 아무것도 하지 마요.”
알았어요? 한껏 날 선 물음은 경고다. 불필요한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어쩌면 충격적…이었을 상황에 약간이나마 술기운이 가셨는지 벌게진 피부만 빼면 그럭저럭 기억하던 평소의 모습이었다. 어쩌면 집에 들어오자마자 도움 따윈 필요 없다며 휘청이면서도 씩씩한 걸음으로 얼음을 마시는지 물을 마시는지 모를 냉수 한 잔을 크게 들이킨 효과일지도 몰랐다. 물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제 손으로 길러낸 시간만큼이나 오랫동안 떠나있던 아이는 여전히 떠나기 전과 같은 모습이었다. 키가 조금 커지고 물들인 머리를 짧게 잘라냈다는 아주 사소한 점 외에는 정말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은, 서러우리만치 그리웠던 내 소중한 아이. 잃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을 지켜내야 한다는 말로 포장해 네가 바라지 않을 짓들을 애정이라 강요했던 과거는 우리의 관계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테였다. 잊을 수 있을 리 없었고 용서 같은 건 바라지 않으리라 다짐했는데. 그저 단지 그토록 보고 싶었던 너라서, 아가. 쌓이고 고였던 시간들이 넘쳐흐르듯 속절없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네 앞에서 이럴 생각은 없었기에, 황급히 몸을 웅크려 보지만 무릎 맡에 고개를 파묻자 도리어 더 울컥이며 끝없이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너는 그저 암묵한다. 조용히 냉정하게 바라볼 뿐이다. 감정에 호소하며 동정을 구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한들 사면 받을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하지만 또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어 너와 나는 뒤늦은 죄악감에 초라해지는 이 늙은 겁쟁이를 방관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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