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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16, 24:00 - 01:00

페페이 2021. 2. 2. 00:59

 

 

  그 방의 서랍은 언제나 잠겨있었다.

 

  아마 그렇게 시작하는 글이었다. 딱 그 하나만이 어렴풋하게 떠오를 뿐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서랍은 어느 층의 가장 안쪽에 틀어박힌 채 항시 정갈하게 정리된 상태로 붙박혀 해묵어가는 서고 맞은 편 벽에 놓여 있었다. 1m를 조금 웃도는 정도로 키가 높은 3단 짜리 서랍이었고 흰색으로 엉성하게 페인트칠 되어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허물처럼 얇게 벗겨지기 시작했다. 함께 나이 들어 털이 엉긴 양모 카페트 중심에서 벗어난 채로 놓여있었는데, 빛바랜 둥그런 자줏빛 위로 벗겨진 페인트가 금세 눈처럼 쌓이곤 했다. 서랍치고는 화장대 다리에 쓰일 법한 완만한 곡선은 사슴발 같은 쇠받침을 굳건히 딛고 서서 튤립 봉우리를 모방하며 우아하게 오르다 포도덩굴로 여덟 개의 모서리를 화려하게 휘감았다. 칸칸이 들어찬 서랍마다에는 벌새와 백합이 각각 상하 모서리에 양각되어있다. 손잡이는 하늘에 걸린 무지개처럼 가운데에 길게 늘어져 있었고 양 끝은 조각된 구름이 붙잡고 있었다. 이 손잡이는 얼핏 보기엔 단지 투명해보일 뿐이었지만 절묘한 각도로 빛을 받으면 표면에 음각된 무늬를 따라 일곱 빛깔이 부채꼴로 어룽지는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평소엔 아래로 드리운 무지개를 구름 위로 올려 젖히면, 바로 뒤에 가려져 있던 열쇠구멍들이 드러났다. 아래 칸부터 별과 달, 그리고 해의 형태로 각각 양각된 작은 금속판들은 서랍을 치장하는 유일한 색이었다. 그 앞에 웅크려 서서 잠긴 안 쪽에 들어있는 것을 상상하는 눈동자들은 반질반질하게 잘 닦인 황동색 표면에 거울처럼 담기며 색을 더했다. 그 모든 칸들을 수납한 채 굳건히 선 서랍의 윗면은 놀라울 정도로 평범해서, 제법 키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서랍이라는 사실을 잊고서 무심코 기대앉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떤 음각의 무늬도 새겨지지 않았고 시계나 꽃병 같은 물건 하나도 올려져 있지 않았다. 서랍이 올려진 카페트 주변조차도 천장에 닿을 만큼 높은 책장이 30cm 가량의 여백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서고는 벽마저 흰빛 일색이어서 무신경한 사람이라면 그 서랍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지나갈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그 서랍은 언제나 잠겨있었다. 열쇠의 위치는 고사하고 생긴 모양새도 알 수 없었다. 서랍의 열쇠구멍의 생김이 그러하니 열쇠의 손잡이도 각각 별과 달과 해일 것이라는 추측뿐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 서랍의 열쇠꾸러미를 본 적이 없다. 그 누구도, 아무도.

 

  …어디의 어떤, 어느 누가?

 

  그 방의 서랍은 언제나 잠겨있었다. 그렇게 시작하는 글은 오로지 서랍에 대한 서술만으로 가득했다. 단지 어떤 존재하지 않는 서랍에 대해 얘기하는 것에만 집착한 나머지 정작 서랍을 잠근 사람과 사용된 열쇠, 그 안에 들어있던 물건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상태가 전제되었다. 그저 어딘가 사람들의 발길이 닫지 않은 모서리에 외떨어진 채로 잠겨있었다. 하지만 다시금 문장이 시작될 때마다 서랍에 사로잡힌 이들은 이 공백 속에 나타났고, 서랍은 언제나 잠겨있었으며, 그들에게 할애된 공간과 사고도 서랍에 국한되었다. 책장과 책장 사이 자주색 원형 카페트 위에 흰 벽에 기대 놓여있는 흰 서랍만이 그들이 가진 세계의 전부였다. 책장은 무슨 색이었을까, 벽처럼 희었을까? 이것은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잠긴 서랍에 대한 예찬만이 중요했다. 서랍이 은닉한 비밀에 갈증을 느끼면서도 그러한 기갈 상태에 만족하다가, 무심코 열쇠구멍을 들여다보면, 또다시 서랍이 있었다. 책장과 책장 사이에 30cm 간격을 두고 벗겨진 페인트가 떨어진 자주색 원형 카페트 위에 아무것도 칠해지지 않은 흰 벽에 기대 놓여있는 3단짜리 흰 서랍만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때, 찰칵, 어디서 잠금장치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면 어느 새인가 잠겨버린 사람들에겐 서랍만이 남는다.

 

  그 방의 서랍은 언제나 잠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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