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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5, 22:14 ~ 23:10

페페이 2021. 2. 5. 23:10



  "자, 이곳에 동전 하나가 놓여 있다고 치자."


  이야기는 그로부터 시작된다. 이를 믿는다면 그렇게 될 것이고, 그러지 않다면 우리는 조금 뒤로 돌아가야만 한다. 동전이 놓이기 전의 가정부터 전제하도록 하자. 동전의 형태는 어떠한가, 실로 통용되는 화폐인가? 그렇지 않다면 가상의 화폐인가? 이마저도 아니라면 이것은 어디에 쓰이게 될 것인가? 사행성 기기나 캡슐 뽑기 기계 등에만 한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플라스틱이나 알루미늄제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동전의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은 이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인가? 만약 금이나 은으로 되었다면 정체 따위는 아무래도 좋을 것이다, 동전 자체만으로도 현물적인 가치가 있으니까! 하지만 잠깐, 냉큼 집어들기 전에 조금 더 생각해보도록 하자. 주인 없는 물건에―우리는 이것에 대한 가설과 예시들을 들먹이고 있을 뿐, 공상에 기반한 허구는 결코 소유주가 될 수 없음을 인지하고 있으므로―그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한다면 습득한 후에 대해서도 고려해 보는 편이 낫다. 혹시 모르지, 소설이나 영화에 흔히 나오듯 전문가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이라거나 장치가 설치되어 있을지도. 동전이 가진 현물적 의의가 목적이라면 우리는 당연하게도 이를 처분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테다, 명백하게! 그러므로 찰나의 견물생심이 취조실까지의 지름길로 이어지기 전에, 우리는 동전과 마주하게 된 전후 사정과 배경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이 자그마하고 앙증맞은 친구와 우리는 어디에서 조우하였는가? 아스팔트와 벽돌 깔린 대로변 위? 잡초가 무성한 흙밭? 고급진 벨벳으로 덮인 게임 테이블 위일지도 모르고, 아, 그렇다면 이것은 포커칩이 될 수도 있다. 통상의 자판기 아래라면 만에 하나 우리의 지갑에서 떨어지고만 가엾은 잔돈일 수도 있고, 한 눈에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던전 속 위태한 횃불 아래에서라면 정말로 귀중한 금화일 수도 있다. 또는 어떤 교통수단의 좌석 위일 수도 있겠지. 누군가 흘렸거나, 잃어버렸거나, 두고 내렸거나, 세상에나 끔찍하게도,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 빼앗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요즘 세상에 동전보다 지폐가 상위 단위임을 생각하면, 이것이 특별하게 취급될 이유로 놓여 있기 위해서는 이 동전 자체가 갖는 어떤 특수성에 주목할 수 밖에 없다. 다만 이는 이미 지나온 물음들 중에 하나다. 이 동전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으로 비춰지는가? 물론, '동전'은 가상의 물체이며, 아니, 어쩌면 물체가 아닐 수도 있다. 동전의 정의란 '동그랗게 생긴 모든 돈'을 의미하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그 비슷한―대부분 둥글고 작은―사물에 대한 비유를 위해 입맛대로 재단하기 마련이다. 합금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조건 마저 생략한 채 말이다. 그리고 또한, 이 동전이 銅錢과 棟箭 중 어느 쪽의 것인지도 주의하여야한다. 만약 후자라면 우리는 여태껏 누란한 모든 서술들을 뒤짚어 엎어야한다! 흡사한 사례로는 '동전'이 그렇게 읽힐 뿐인 실 서술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허나 이는 다행스럽고도 당연스럽게도, 보통 기록이 놓여있을 경우에 우리는 서술된 내용만을 읽지 않고 이러이러한 내용이 적혀있는 대상이 놓여있다라고 표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수다스러운 동전은 실제로 존재하는―우리가 가설한 어떤 임의 공간 내에 한정하여―물건이라 확신할 수 있다. 우리는 이로써 겨우내 논제 하나에 대한 답을 내렸다. 이것은 추상인가 구체인가? 그렇다, 실존한다! 이제 자연스럽게, 우리는 또다른 주제를 향해 기운다. 그래서 이 동전이 '무슨' 동전이라고? 이야기가 시작된 이래 쉼없이 1283자의 글자들과 403번의 공백들이 이어졌는데도 우리는 아직도 초장에 머물러있다! 하지만 그래, 눈치 챘듯이, 우리는 이미 이야기 속을 거닐고 있다. 그렇지 않다고 부정한들 이렇듯 후미에까지 이르렀다면 보아라, 우리는 이리도 확실하고 분명하게 같은 맥락 속에 있으며 우리가 쌓아온 이야기들이 웅장한 덩어리가 되어있도다. 이곳에 다달았다는 사실이 중요할 따름이다. 동전이 어떻고 저쩧고 간에,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주체는 우리에게 있다. 무엇 하나 확실해진 설정은 없지만 어렴풋해졌다면 화자는 다시금 입을 열 때가 되었다.


  "자, 이곳에 동전 하나가 놓여 있다고 치자."


  무슨 동전이 놓여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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