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터오는 새벽하늘 한 켠으로 이른 별이 아른인다. 채 흐려지지 않은 달과 샛별 사이 쪽빛의 시간, 여윈 뺨의 노인은 곤한 숨을 흘려내며 침상 위로 몸을 누인다. 간밤이 불러낸 서리가 외벽의 창이며 망원경의 렌즈까지 두텁게 내려앉아 영 짧지 못한 동안 골머리를 앓은 탓이다. 켜켜이 싸인 산맥의 봉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위치상 자주 부닥칠 수 밖에 없는 일상이지만, 소일거리로 삼기에는 해묵어가며 이곳저곳이 결리기 시작한 몸뚱이가 세월을 변명삼아 삐걱이더랬다. 창 너머 이른 새 울음의 메아리를 듣는다. 덜 닦여 덩굴손마냥 들러붙은 서릿발이 희게 어룽진 무늬 틈으로 볕살이 산개한다. 땅 위의 것들이라면 모름지기 태양을 따라 순례함이 온당하였으나 그가 어버이 섬긴 별이란 새벽녘과 초저녁에나 비추는 금성이었다. ..
멈춰 선 펜 끝에 잉크가 번진다. 불현듯 치밀어 손 끝이 식어가는 감각은 불안이라 명명된다. 기실, 데보라 크레메르는 생에 있어 단 한 번도 글을 써본 적이 없는 탓이다. 주변 이들은 그를 가리켜 활자 중독이라 입을 모았으나 기껏해야 일기장의 몇 줄이나 낱장의 편지들이 고작이다. 누구에게도 펼쳐 보인 적 없고 부치지도 못하여 아무도 읽지 못한 문장들은 언제나 서랍 한 구석에 몸을 웅크린다. 이는 현재에 이르러서도 그리 달라지지 않은 성질 중 하나였다. 항시 책장 밖 여백에 존재하며 온갖 저술을 탐식하는 자는 아이러니하게도 타자의 기억 속에서 망각으로 머물기를 바랐다. 잊을 수 없다면 잊혀지면 그만이다, 그들과 함께. 억지로 삼켜 견뎌낸 논리란 눈꺼풀과 혓바닥에 각인된 얼굴들과 이름자들에 기인한다. 다시금..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아이는 답지 않게 홀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진탕 취해있었다. 제 또래라기엔 조금 연상으로 보이던 낯선 사람에게 업혀 잠에 들었나 싶다가도 퍼뜩 고개를 들며 아무 것도 신지 않은 양 발을 까딱거렸다. 처음 보는 모습보다 제가 길러냈음에도 수년간 한 번을 보지 못한 허물없는 아이의 행동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내가 없는 곳에서는 평범하게 다른 사람들처럼 지내고 있었구나. 진심으로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그 조건에 제 부재가 전제된다는 사실을 체감하자 꼴사납게도 눈가에 열이 고이기 시작한다. 서머, 정신 차려. 서머.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어깨가 움츠러든다. 저가 아닌 제 아이의 쪽일 게 분명한데. 왜 자꾸 불러요, 선배. 얕게 키득이며 점점 더 느슨해지는 아이의 표정이란 한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