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방의 서랍은 언제나 잠겨있었다. 아마 그렇게 시작하는 글이었다. 딱 그 하나만이 어렴풋하게 떠오를 뿐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서랍은 어느 층의 가장 안쪽에 틀어박힌 채 항시 정갈하게 정리된 상태로 붙박혀 해묵어가는 서고 맞은 편 벽에 놓여 있었다. 1m를 조금 웃도는 정도로 키가 높은 3단 짜리 서랍이었고 흰색으로 엉성하게 페인트칠 되어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허물처럼 얇게 벗겨지기 시작했다. 함께 나이 들어 털이 엉긴 양모 카페트 중심에서 벗어난 채로 놓여있었는데, 빛바랜 둥그런 자줏빛 위로 벗겨진 페인트가 금세 눈처럼 쌓이곤 했다. 서랍치고는 화장대 다리에 쓰일 법한 완만한 곡선은 사슴발 같은 쇠받침을 굳건히 딛고 서서 튤립 봉우리를 모방하며 우아하게 오르다 포도덩굴로 여덟 개의 모서리를 ..
어디부터 잘못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이것이 ‘잘못’으로 분류되는 이유조차 납득할 수 없었다. 피험 대상의 진행 거부? 대상의 부적응은 사전에 염두하고 있던 바였다. 실험은 전제부터 강제성을 띠고 있었고 이는 대상의 의사를 전면 배제했다. 하지만 그 외의 방법으로는 성립될 수 없는 실험이었다. 그도 그럴게 그 대상이란 이미 5년 전에 사망한 자신의 손녀였으므로.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죽은 아이는 인내심과 이해심이 많았다. 소위 애늙은이라 불리는 부류에 가까워 또래들 사이에 두고 비교하자면 퍽 의젓하고 관용 있게 굴 줄 알았다. 문제가 있다면 첫 번째, 아이들은 쌍둥이로 태어났으며 두 번째, 다른 아이는 외관을 제외한 모든 면에 대해 죽은 제 자매를 전혀 닮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소리조차 제대로..
돌이켜 생각하건대, 아마 말은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발톱으로 움켜내듯 성기지만 날카로이 내뱉어지던 새된 숨소리를 기억한다. 폐부 깊이 들이켜진 공기가 내부 발화기관을 거치며 달구어지다 못해 낮게 지글거리다 송곳니 틈으로 번져 흐르던 아지랑이를 기억한다. 더없이 포악하지만 동시에 당당하기 짝이 없게 아가리를 활짝 열어젖히며 드러난 날선 치열과 그 안쪽, 어두운 목구멍보다 그 깊숙한 어딘가에서 타닥타닥 튀어 오르던 불티를 기억한다. 어느 지방의 설화에서는 그들이 죽은 자리에는 산이 생긴다더니만, 실제로 이리 마주하자 몇 겹의 고개들을 겹쳐내고도 모자랄 만치 거대한 몸뚱이에서 울려오는 모든 감각들이 재앙으로 살아 숨 쉬던 그 면면의 전부를 기억한다. 그래, 우리의 첫 대화는 생존을 앞세운 위협과 경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