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멸하는 시야. 호흡의 작은 떨림조차 이명으로 번지기 시작한다. 마른 밭에 번지는 잔불처럼 삽시간에 공기를 가득 채우며 울려 퍼진다. 발 아래에서부터 준동하며 머리맡까지 기어올라 갉작이는 소음. 찰나를 영원 같이 조여내던 그것은 공간을 밝히는 빛과 함께 멎어든다. 천장과 바닥, 벽 모두 동일한 형식으로 이루어진 공간은 작은 큐브를 닮았다. 바닥 면에 손을 뻗으니 매끄럽고 부드럽지만 단단한 표면 아래에서 엷은 온기가 느껴졌다. 불투명한 재질은 아크릴같으면서도 달랐고 그 너머에 빼곡히 조명을 설치한 모양이었다. 귀를 기울이자 희미하게 기계 작동음이 들렸다. 아마도 열기를 식히기 위한 냉각장치가 아닐까. 어쩌면 다른 장치가 있을 지도. 확실한 것 하나 없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분명한 한가지는, 출입구가 없..
말 그대로 숨이 막힐 것 같아 등을 두드리자 선배는 그제야 힘을 풀었다. 그의 채도 낮은 모래색 머리칼이 내 안경에 엉킨 탓에 미안해, 실례 좀 할게요, 그런 열없는 말들만 속삭임처럼 오고갔다. 마디를 세우며 설긴 매듭을 푸느라 꼼지락이는 투박한 손가락들을 본다. 그는 분명 겉보기와 달리 섬세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만큼 조심스러운 성격이었다. 부끄러움이 많아 쉽게 당황하고 헛손질을 했다, 지금처럼. 몇 번이고 미끄러지는 손 끝. 머쓱해진 그가 무심코 습관처럼 머리카락을 넘기자 단단히 끼인 가닥 몇 개가 투둑 끊어진다. 얕은 한숨이 샌다. 그늘 짙은 그의 얼굴이 염려 깊은 두 눈에 눈부처를 새긴다. 선배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이 낯설어 내가 할게요, 우리 사이의 이 별 것 아닌 매듭을 풀어낸다. 이렇..
또래들은 21번지에 있는 세번째 집을 '인형의 집' 이라고 불렀다. 집 주변을 둘러선 키작은 붉은 벽돌담 뒤로 쇠 푸른 덩굴무늬 철창이 고상하게 솟은 집이었다. 할머니 엠마는 철창 끝에 예리하게 봉우리 진 조각이 백합을 상징한다고 했다. 그 아래 유연하게 얽힌 잎새 덤불은 엉겅퀴와 담쟁이일 것이라고, 금요일 저녁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마다 안경을 밀어올리며 장담했다. 아이들은 21번지를 지날 때마다 나뭇가지를 들어 악기를 연주하듯 창살 위를 두드리곤 했다. 다른 밋밋한 울타리보다 다양하고 우스운 소리가 난다는 것이 이유였다. 나는 이 점잖고 우스꽝스럽게 화려하지 않은 장식보다도, 중간에 아치 모양으로 구부러지는 부분이 좋았다. 정점에 올라 가 있는 고양이 장식이 기지개를 펴고 있는 탓도 아주 없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