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은 유독 비가 엄청났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희뿌옇게 쏟아지는 통에, 채 돌아가지 못한 아이와 사내는 속이 빈 거목 아래에서 발이 묶이고 말았다. 사실 이른 아침부터 단단히 퍼부을 조짐이 보이던 터였다. 사내는 제 어린 아들에게 해가 머리맡을 지나기 전에 돌아오라 일러두었지만 이제 막 내달리기에 익숙해진 아이는 한참 세상만물이 신기할 법한 때였다. 최대한 늦지 않게끔 밖을 나섰으나 아이를 찾았을 즈음엔 먹구름이 발꿈치 끝까지 몰려와 있었다. 점차 어둑해지는 데도 비는 그칠 기미가 없었다. 천둥이 우는 소리는 벌써 머리맡까지 와 있었으며, 숲이 온통 물기를 머금은 탓에 젖지 않은 발치마저 부드럽게 눅어가고 있었다. 사내의 옷자락을 움켜쥔 채 벙어리를 자처한 아이는 잔뜩 풀이 죽어 금방이라도..
바람이 부는 소리가 들렸다. 꽃 핀 가지마다가 무거워 고개 숙인 끄트머리가 창가를 두들겼으며, 맞닿자 열없이 흩어지고마는 연분홍들이란 금새 작별을 고하며 봄과 함께 넘실거렸다. 몰라보게 따스해진 햇살은 노란 셀로판지 빛이었다. 엷고, 보드랍고, 다정하며, 또한 무구하다. 눈을 감고 있노라면 그 안온한 무해함에 지나칠 정도로 느슨해지고 마는 것이다. 무심코 창문과 함께 방충망을 걷어내본다. 난간에 짧게 머문 봄비의 흔적과 꽃잎의 무늬를 대강 쓸어내며 그 위에 턱을 괴인다. 분분한 낙화—엉거주춤 숙여내며 떠올린 문구는 어느 시에서 왔을까, 아무래도 좋을 일에 하릴없이 시간을 흘려보낸다. 그러다 문득 미처 손 끝으로 훔치지 못한 먼지들로 까매진 팔꿈치를 발견한다. 발치로 쏟아져들어온 꽃잎들을 눈치챈다. 지독히..
그림자가 길어지기 시작하자 숲은 금새 어스름으로 가득 찼다. 윤곽만을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짙은 숲의 어둠 너머로 그것의 푸른 눈만이 선연하다, 그러나 고요했으며. 또한 어째선지 초연한 눈을 가진 그것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 아주 느리게, 실을 잣듯 제 위로 드리워진 나무 그늘 한 귀퉁이를 잡아내더니 후드처럼 푹 덮어내는 것이다. “이 이상 머물러봐야 댁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을 거요.” 그러니 날이 밝으면 돌아가쇼. 그것의 목소리가 나뭇가지 사이들을 배회하다 바람이 되어 흩어진다. 멀어지는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선잠에 들어 꿈을 꾸었다 여기기엔 지나치게 또렷했으며 솔직한 목소리였다. 귀찮게 굴지 말라는 듯한. 아지랑이마냥 일렁이던 엷은 주홍빛마저 가시고 온전한 밤이 내려앉은 뒤에야 노기사..
방아쇠를 당겨 장전된 총알을 쏘아내기까지 앞으로 아주 조금이었다. 여왕은 노기사에게 3개월이라는 시간과 이 허무맹랑한 임무를 포기할 수 있는 자비를 함께 내렸지만, 노기사는 불충을 입에 올리며 포기 대신 2개월의 시간을 추가로 받아냈다. 그 시간마저 이미 절반이나 낭비하여 시간은 이미 새로운 달에 접어들고 있었다. 일말의 조바심조차 나지 않는다면 거짓이었을 테지만 그는 스스로를 제어하는 것에 익숙했다. 검지 손가락 하나만 까딱, 한다면. 분명 그가 맡은 일이 마무리될 터였다. 오랫동안 하나의 주인만을 섬겨온 그에게 있어 명령은 절대적이었으며 그에 대한 반문과 의심이란 결코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남쪽 숲에 살고 있다는 영악한 짐승을 처치하게. 꼭 잠들기 전 아이들을 위해 펼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