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을 추모하며 고개 숙인 이는 완연한 겨울이다. 제 어미와는 다른 어떤 무채색. 마마는 손 대면 따스하게 녹아 스미는 눈 같은 사람이었지만, 당신은 작은 온정 하나에도 위태하게 바스라지면서 굳건한 체를 한다. 메마르고 창백한 회벽의 색. 알고 있다. 당신의 깊숙한 곳에서 축이 되었던 자는 아주 오래 전에 부숴졌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당신은 아무렇지 않으려 들었고 친족들은 그렇기에 당신을 방관했다. 반려를 잃은 자의 애상이란 무릇 낙인과 같은 것이었으므로. 당신 같이 무른 이에겐 그가 더없는 구원이자 낙원에 가까웠으리라. 나이를 탓하기엔 부쩍 왜소해 보이는 당신의 등을 여상한 낯으로 쓸어낸다. 매년 이맘때면 선명해지는 그의 앳된 얼굴, 이름자, 그리고 그를 회고하며 떨리는 손에 얼굴을 묻는 당신. 가엾은..
어쩜 이다지도 따스할까, 잠에 든 어린 것의 머리맡에 코를 대자 연한 햇볕 내음이 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채 가시지 않은 젖 내음, 부드럽게 묻어나는 섬유 특유의 마른내와. 이런 정보들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강렬하게 파고드는 일족의 체취. 눈 앞에 어룽지는 붉은 빛보다도 짙고 선명하게 비강을 타고 온 몸으로 번져 영혼에 와닿는다. 아직 숨기지 못하며 시시각각으로 한들이는 작은 귀와 꼬리를 눈에 담는다. 제 엄지도 다 쥐어내지 못할 작은 손이 허공을 움키며 맴맴 호를 그리는 것을 따른다. 잠결에 옹알이는 소리에 행여나 무슨 의미가 담겨 있지는 않을지, 흐트러진 머리칼을 빗어내며 가만 귀기울인다. 엷게 젖은 숨이 살갗에 스미듯 흐른다. 한 손으로 다 가려지는 작은 가슴 아래에서 제 것보다 ..
누군가 이름을 불렀던 것 같은데. 사내는 잠시 멈춰서 뒤를 돌았으나 그가 걸어온 길 위에는 응당 아무도 없었다. 걸음 소리도 없고 그림자조차 없다. 그의 존재마저 부정하듯이 미온의 볕만이 무겁게 가라앉은 길은 괴괴하다. 언제부터 걸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끝이 있는 지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사내는 지친 발을 하염없이 옮기며 검은 해를 향해 걸어간다. 낮게 부유하며 야트막한 능선에 무거운 몸을 괴인 그것은 마치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입구처럼 보였다. 이 길이 끝나면, 저 끝에 도달하면. 처음에는 헤아릴 수 없는 상념과 잔념들이 뒤엉켜 포화상태였지만 지금은 그 집념만이 오롯하게 남았다. 그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오로지 그 하나 뿐이다. 그러다 제 자신마저 잊어 정말로 길 위에 아무도 남지 않는 순간이 오..
말하고자 한다면 입에 올릴 수 있었던 문장은 많았으리라. 오늘 있었던 일, 요즘 사는 세상, 언젠가에 대한 근황, 하다못해 날씨와 흘려들은 텔레비전 너머의 소음들, 중얼임, 골목 언저리에서 놓치고만 길고양이의 긴 꼬리라거나, 바람에 흔들리던 나뭇잎들, 철지난 가요와 어디가나 똑같은 음악들, 웬일로 부대끼지 않았던 출근 버스, 운 좋게 오븐이 열리는 시간에 지나갔던 빵집 옆길, 가로수 아래에서 주운 100원짜리 동전과 같은, 그런 것들. 그래, 당신과는 상관없는 것들. 흔해 빠진 고백을 주워 삼키지 못해 흔해 빠진 이야기들을 주절거렸다. 소리들은 모두 마주앉은 상대에게 향했으나 서로가 여백이 되는 대화들은 그저 무난하고 평행하게 이어진다. 대화의 연장선, 당신과 나는 이렇게 딱 커피 두 잔이 놓일 정도의 ..
두려움은 거울이다. 자기중심적이며 폐쇄적이다. 불투명한 무지로 둘러싸인 채 무위를 온존하다 깨어진 불완전이 날을 세우며 목을 찌를 것이다. 자멸할 것이다, 이성이 거세된 자들이여, 진화를 거부한 자들이여. 마지막 겁쟁이들을 실은 무인선이 이윽고 대기권을 벗어났다. 구원이 닿지 않는 영원한 어둠 속을 항해하며 그들은 퇴색의 길을 택했다. 이제 저 하늘을 가리는 불손한 자들은 사라졌다. 다가올 아득한 밤을 경배하며 모든 존재들은 길 위에 멈춰 섰다. 우리는 아침을 맞이할 것이다, 빛으로 거듭날 것이다, 불타오르는 지평을 낙양 삼아 사그라들듯 자애와 평온으로 가득한 잠에 들 것이다, 완전하며 완벽한 고요가 우리를 감싸 안을 것이다. 타이머가 붉게 점멸한다. 온 세계가 0으로 수렴하는 그 순간 우리는 새로운 흐..
너머에서 저녁식사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아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풀섶을 가로지르고 울타리를 뛰어넘었다. 어지럽게 뒤엉킨 나무그늘을 해치고 노을을 등진 새들이 시커멓게 떼 지어 날아올랐다. 덤불 열매와 키 낮은 잎새 따위로 얼룩덜룩해진 흰 옷의 아이들은 몰려오는 밤을 술래 삼아 교회까지 내달렸다. 왁자한 외침들이 마른 가지 마다에 웅성이며 을씨년스레 일렁였다. 지척까지 드리운 그림자가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며 경주는 이어졌다. 검은 숲과 사랑의 집 사이에 놓인 흰 울타리가 경계였다. 도착한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저가 가장 먼저 도착했다며 소리를 높였지만 누구도 그늘 끝에 서 있던 마지막 아이를 찾지 않았다. 이 어린 양들의 안전을 위해 방울을 달아둔 끈만이 붉게 흔들리며 석양에 작별을 고한다. ..
땅거미가 짙게 잠겨 구릉 아래로 고개를 누일 때면, 산허리를 타고 내려온 밤이 골짜기의 가장 낮은 곳까지 고이기 시작한다. 능선 위로 드러난 달빛은 유리창에 무늬를 새기고 길 위를 배회하는 바람은 늦은 자장가를 뇌까린다. 잎새를 다 잃고 메마른 이방인이 문간과 창틀을 두들긴다. 불가에 모여 앉은 어린 것들은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조르다 어느새 머리맡을 덮은 제 그림자에 놀라며 이불 밑으로 숨어든다. 이런 때엔 그들이 온단다, 마을 밖 고목만큼이나 주름 깊은 노파는 그제야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면 이리저리 머리를 맞대고 누워 별처럼 눈을 빛내며 숨을 죽이는 것이다. 따각따각, 손가락만큼도 안되는 날붙이로 나무열매 껍질 벗겨내는 소리와 이따금 타닥이는 불티만이 또렷할만큼 고요해진다. 간..
닦인 길을 벗어나 수풀 쪽으로 방향을 꺾은 아이의 걸음은 바람이었다. 여물기 시작한 어린 가지들을 헤치고 잎새를 가로지르며 내달린다. 흩어지는 케이프 자락이 작은 날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정말 한 마리의 새 같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그늘로 막힘없이 흐르며 너머의 빛으로 향한다. 노인은 그런 아이에 비해 한참을 뒤처져 있었지만, 신중하면서도 느리지 않은 걸음으로 곧게 그 작은 등을 따랐다. 제법 경사가 있는 길이었음에도 아이는 어느새 숲을 빠져나가 그를 재촉하고 있었다. 해를 등져 얼굴에 온통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으나, 아이는 점차 길어져 가는 여름볕보다 환하게 미소한다. 그것이 너무도 따스하고 선명해서 노인은 일순 눈이 부시다고 여겼다. 능선을 타고 바람이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저 멀리..
“이봐, 나으리.” 이리 부르고나면 그는 조금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깊이 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이마를 짚을 정도였던 지라 그때에 비하면 꽤나 익숙해진 듯했다. 부름에 의미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경박하고 목적없는 부름에도 정직하게 눈을 맞춰온다. 지나칠 정도로 진지하다는 생각을 한다. 또한 그만큼 올곧은 사람이라고도. 뭐, 많이는 아니고 아주 약간은. 상대에게 충실하기 짝이 없는 시선과 막연히 마주한다. 지긋한 나이임에도 총기가 가시지 않은 푸른 눈을 본다. 지천에 널려 매일같이 마주하는 색이었으나 이를 타인에게서 보는 것은 간만이었다. 숲에 사람의 발길이 끊긴 까닭도 있지만 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기를 꺼린 탓이다. 물론 드러낼 생각도 없었다. 그랬었는데. “…무언가 할 말이 있다면 편히 하게...
뭘 그리 빤히 보는 게요. 툭 쏘아 붙이는 듯한 소리에 노인은 뒤늦게 그와 눈을 맞췄다. 말투와 달리 숲을 닮은 녹빛의 눈은 항상처럼 담담하게 자신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비록 그의 미간 사이에는 주름이 깊고 입술은 새처럼 비죽이고 있긴 했지만, 어쨌든 그가 그렇게까지 불쾌해 하고 있지 않다는 것쯤은 알았다. 벌써 마주한 지 보름에 가깝다. 이 낯선 자는 어김없이 달이 뜨기 전에 그늘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나선 한껏 못마땅한 얼굴로 노인이 갓 피워낸 모닥불을 삐딱하게 바라보다가 말없이 한숨을 내쉬곤 그 앞에 앉아 불을 쬐는 것이다. 달이 그들의 머리 위에 오를 때까지. 노인은 그를 반길 수 있는 입장이 아닌지라 그가 나타나면 본래보다 세 배는 더 과묵해졌다. 그 또한 그리 수다스러운 편은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