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이 선잠에서 깨어난 것은 탁자 위에 놓아둔 양초가 절반도 채 타지 않은 무렵이었다. 때 아닌 폭풍우로 창틀과 문간이며 지붕까지 좀처럼 진정될 기미 없이 퍽 요란하게 들썩인다. 빛바랜 걸쇠와 경첩들은 삐걱이고 유리창은 덜덜댄다. 쉼 없이 퍼부어지는 통에 바깥은 바로 너머의 것도 한 덩어리의 먹구름으로 뭉개버린 채, 간간히 내리 꽂히는 번갯불에나 겨우 희게 질릴 따름이었다. 빗소리 사이로 무언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와 물웅덩이 번지는 소리가 이지러진다. 지붕 어딘가가 날아다니던 잔해에 벗겨져 비가 새는 듯했다. 노인은 낮게 한숨을 삼키며 마른 낯을 쓸어냈다. 분명 얼마 전에 단단히 보수를 해두었음에도 주인과 다를 바 없이 해묵은 몸뚱이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정말 이런 걸로 되겠어? 노인이 이곳에 ..
깨지 않는 꿈은 없다.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시간을 멈출 수는 없다. 얼어붙어 창백하게 어그러져가는 창유리 위로 서리의 결만 선명해간다. 유빙들이 치받으며 내지르는 기성의 기록이다. 천지를 뒤덮은 잿빛은 가실 기미가 없다. 오늘도 두텁게 깔린 눈구름 아래 수면은 액사한다. 푸른빛조차 잃은 파도는 투명하게 그늘을 내비친다. 거뭇하게 잠긴 파도 위로 흰 거품이 괴괴하게 흐른다. 강설하지 않는 정적의 정경은 진즉부터 색을 잃었다. 불온을 쑤군거리던 외인들조차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호흡을 감추고 불씨를 꺼트린 채 마른 나무토막 밑으로 몸을 숨겼다. 동토의 족하에는 외경하는 시선들이 겨울을 버티려 엉겨든 벌레마냥 바글거렸다. 이내 그마저도 잦아든 후에는. 벌어진 아가리 깊은 곳에서 들척지근한 군내가 꽃..
안식이 깃들었어야 마땅했으나 불길하기 그지 없던 일요일 아침. 지평의 끝이 곧 울타리의 끝이었던 드넓은 목초밭은 뿌리까지 메마르고 무수한 종의 금수가 어울려 살아가던 숲은 재가 되어 부나꼈다. 거울과 같아 하늘과 맞닿았던 호수는 거멓게 뒤덮여 황의 내음이 맴돌았다. 앙상한 백골들만이 어지럽게 헤집어진 대지를 끌어안는다. 암운으로 뜻을 밝힌 천명이란 일말의 자비 없이 날 선 뇌거를 동반했다. 망령은 어느새 발꿈치 뒤에 서 있었다. 노인의 질긴 숨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진다. 저 멀리 새로운 죄인을 낙인찍기 위해 아가리를 벌려 고하는 구폐를 듣는다. 검은 것이 몰려온다. 그것은 죽음이자 저주이며 약탈을 이름 삼는다. 표적은 명백하다. 업보는 뒤틀린다. 사지를 덜덜이며 욕지기가 치미는 입을 열 손가락으로 틀어 ..
그의 품에서는 쓰이다 만 문장은 마침표 하나조차 붙이지 못하여 여백을 방황한다. 굳은 마디에서 단어 마다들이 삐걱이는 소리를 듣는다.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는 의미들, 익숙해진 맥락만이 손가락 틈새에 엉겨온다. 추상의 화자는 공백에 머물다 흐려진다. 망설임과 수치심만이 명료해간다. 돌이켜 미적지근하게 남은 감상이란 잔 아래 거멓게 늘러 붙은 찌꺼기 따위와 진배없다. 한 때 맑고 따스하게 찰랑이던 영감은 수증기로 흩어 사라진다. 안온과 도태는 손쉽게 이면을 함께했다. 익숙한 나열들이 손 끝에 묻은 잉크처럼 테두리를 달리하며 일그러진 상을 양산한다. 침체되기까지 아주 약간의 시간만이 남았거나, 혹은 이미 끝 모르고 잠겨가는 지도 몰랐다. 짐작과 추론, 어떤 의문만이 배회하다 멎어든다. 내부는 커녕 겉조차 ..
노부부는 손을 맞잡은 채였다. 그들은 면회실로 들어온 낯선 사내를 어색하게 바라보며 서로의 손을 힘주어 감쌌다. 이리저리 뻗친 검은 머릴 신경질적으로 헝클어낸 그에게선 은연하게 풀내음이 났다. 막 진창을 가로질러 오기라도 했는지 문에서부터 이어지는 흙발자국들. 노부는 안경을 고쳐썼고 노파는 흘러내린 숄을 정돈했다. 이 주변 일대에는 그럴 만한 곳이 없을 텐데, 나이든 이들이 으레 그러하듯 분명 홀로 중얼이는 말이었을테지만 무거운 침묵 위로 퍼져나간다. 사내는 쏘아보듯 그들에게 시선을 두다가 젠장, 작지만 선명하게 욕지거릴 뱉었다. 제 몫으로 놓여진 철제의자를 우악스레 끌어당겨 앉자 요란한 소리가 울린다. 잠깐이지만 그의 손에 새겨진 무수한 흉이 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가 너절한 점퍼 주머니 안으로 사라진다..
명멸하는 시야. 호흡의 작은 떨림조차 이명으로 번지기 시작한다. 마른 밭에 번지는 잔불처럼 삽시간에 공기를 가득 채우며 울려 퍼진다. 발 아래에서부터 준동하며 머리맡까지 기어올라 갉작이는 소음. 찰나를 영원 같이 조여내던 그것은 공간을 밝히는 빛과 함께 멎어든다. 천장과 바닥, 벽 모두 동일한 형식으로 이루어진 공간은 작은 큐브를 닮았다. 바닥 면에 손을 뻗으니 매끄럽고 부드럽지만 단단한 표면 아래에서 엷은 온기가 느껴졌다. 불투명한 재질은 아크릴같으면서도 달랐고 그 너머에 빼곡히 조명을 설치한 모양이었다. 귀를 기울이자 희미하게 기계 작동음이 들렸다. 아마도 열기를 식히기 위한 냉각장치가 아닐까. 어쩌면 다른 장치가 있을 지도. 확실한 것 하나 없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분명한 한가지는, 출입구가 없..
말 그대로 숨이 막힐 것 같아 등을 두드리자 선배는 그제야 힘을 풀었다. 그의 채도 낮은 모래색 머리칼이 내 안경에 엉킨 탓에 미안해, 실례 좀 할게요, 그런 열없는 말들만 속삭임처럼 오고갔다. 마디를 세우며 설긴 매듭을 푸느라 꼼지락이는 투박한 손가락들을 본다. 그는 분명 겉보기와 달리 섬세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만큼 조심스러운 성격이었다. 부끄러움이 많아 쉽게 당황하고 헛손질을 했다, 지금처럼. 몇 번이고 미끄러지는 손 끝. 머쓱해진 그가 무심코 습관처럼 머리카락을 넘기자 단단히 끼인 가닥 몇 개가 투둑 끊어진다. 얕은 한숨이 샌다. 그늘 짙은 그의 얼굴이 염려 깊은 두 눈에 눈부처를 새긴다. 선배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이 낯설어 내가 할게요, 우리 사이의 이 별 것 아닌 매듭을 풀어낸다. 이렇..
또래들은 21번지에 있는 세번째 집을 '인형의 집' 이라고 불렀다. 집 주변을 둘러선 키작은 붉은 벽돌담 뒤로 쇠 푸른 덩굴무늬 철창이 고상하게 솟은 집이었다. 할머니 엠마는 철창 끝에 예리하게 봉우리 진 조각이 백합을 상징한다고 했다. 그 아래 유연하게 얽힌 잎새 덤불은 엉겅퀴와 담쟁이일 것이라고, 금요일 저녁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마다 안경을 밀어올리며 장담했다. 아이들은 21번지를 지날 때마다 나뭇가지를 들어 악기를 연주하듯 창살 위를 두드리곤 했다. 다른 밋밋한 울타리보다 다양하고 우스운 소리가 난다는 것이 이유였다. 나는 이 점잖고 우스꽝스럽게 화려하지 않은 장식보다도, 중간에 아치 모양으로 구부러지는 부분이 좋았다. 정점에 올라 가 있는 고양이 장식이 기지개를 펴고 있는 탓도 아주 없지는 않다..
째깍이는 초침이 비웃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상을 밝히기 위한 밑재료는 모두 준비되어 있다. 거미줄처럼 곳곳에 희미하게 존재하는 흔적들을 끌어내 짜맞추기만 하면 완성되는 맥락이 곧 진실이다. 숨을 가다듬는 사람, 손톱을 물어 뜯는 사람, 발을 구르는 사람, 이죽이며 흥얼이는 사람, 눈물이 멈추지 않는 사람, 침묵하며 방관하는 사람. 각자의 인물들은 모두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했다. 어긋난 말들은 서로의 모순을 꼬집는다. 의심과 흥분은 훌륭한 아군이다. 훼손된 단서는 그마저도 위조되었지만 그 흔적조차 실마리로 빛나며 가려진 대상을 가리키기 시작한다. 주어진 것들은 사리를 밝히는 데에 충분할 정도였다. 오히려 과도함을 경계해야 했을 지도 모른다. 모자람없이 풍족한 지혜, 자만으로의 지름길. 어디..
발판을 잃은 자의 말로는 추락 뿐이다. 뺨을 스치는 바람이 제법 쓰렸다. 휘몰아치며 유약하기 그지 없는 몸에 발톱을 세운다. 얼핏 종결 외엔 남지 않은 이를 힐난하는 것 같다. 차갑게 얼어붙어가는 뺨을 억지로 움직여 입꼬리를 끌어낸다. 실소, 또는 자조. 비명과 같은 울림이 귓가에 맴논다. 결국 울음이 섞이자 점차로 어두워지던 하늘에 뇌운이 번쩍이기 시작한다. 단 하나를 위한 슬픔은 메마른 대지에 단비처럼 스며 만인의 기쁨이 될 것이다. 단 하나를 쥐기 위해 속도를 더하기 시작한 돌풍은 이 땅의 부정한 것들과 함께 만인의 고통을 쓸어낼 것이다. 짙게 깔리기 시작한 어둠 너머로 희미하게 동이 튼다. 그럼에도 선명하게 눈가에 닿는 빛살이 시려 감아버린다. 생각보다 눈물이 나진 않았다. 어차피 정해진 수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