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은 이따금씩 펜을 들었다. 대부분 저녁 식사 후의 다과 시간이 끝나갈 즈음이었다. 창 밖의 하늘은 짙은 보라색이었고, 가지런히 묶인 커튼 자락이 바람에 한들거렸다. 창문을 마주한 책상 앞에 앉은 노인의 단정한 머리카락도 얕게 흔들렸다. 그는 정갈한 자세로 서랍에서 몇 장의 종이와 만년필, 그리고 양초와 도구 몇가지를 꺼낸다. 집 안의 양초는 모두 노인을 닮은 흰색이었지만 이때만큼은 조금 특별한 양초를 사용했다. 어두운 녹색인데다 양초라곤 했지만 심지도 없었다. 잠시간의 고민을 거쳐 써내려간 편지들을 봉투를 담은 뒤에 사용하는 것이라했다. 이젠 거의 사용하지 않는 방식이라고, 넉살좋은 우체국 직원이 아이에게 속삭였으나 그의 방식은 한결같았다. 사실 아이도 그 특이한 편지가 싫지는 않았다. 녹색의 양초가..
문득 눈을 떴을 때는 자정을 갓 넘긴 새벽 즈음이었다.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흐린 빛에 이제야 돌아왔구나, 한숨과 함께 안도하며 빈 자리를 쓸어낸다. 서로의 곁을 내어주기 시작하면서 침대를 같이 쓰는 것은 암묵적인 규칙이 되었다. 계기는 공간 절약이었던가. 뭐, 혼자였다면 몰라도 둘이 살기엔 좁은 집이니까.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이유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을 정도로 퍽 당연시 하게 되더랬다. 보기보다 외로움을 타는 성격이었던가, 덜 깨인 눈으로 천장의 무늬를 세어가다 나른함에 느슨해간다. 그럴지도 모르지. 사람의 온기란 건 한 번 알아버리면 돌이킬 수 없는 노릇이니. 잠결을 핑계 삼아 독백을 씹어내던 것도 잠시, 다시금 시계를 확인하자 생각보다 제법 시간이 흐른 뒤였다. 문 너머의 불빛은 여전한데 대체 ..
침대 맡의 이야기는 언제나 정겹고 친절했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이야기의 끝을 이렇게 매듭지었다. “이웃들에겐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단다.” 반드시 명심하렴, 염려 깊은 목소리는 곧 제 떨림을 감추기 위해 아이의 이마에 입맞췄다. 아이는 익숙히 그의 뺨에 입맞추곤 알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도 한참을, 아버지는 엷고 가느다란 머리칼을 쓸어내며 아이의 곁을 지켰다. 짙은 녹빛으로 물들인 결에서 희미하게 약초 내음이 묻어난다. 닿는 손길에 나긋해지다 어느새 잠이 든 얼굴이란 평온하기 그지없다. 젖살 올라 도톰하고 보드라운 언저리를 가만 매만지자 잠결에 고개를 기대온다. 그러다 문득 갓 태어났을 즈음의 아이를 떠올린다. 황금으로 자아낸 실과 같은, 한낮을 빗겨난 늦은 오후의 온기를 머금은 색, 추수를 앞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