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곳에 동전 하나가 놓여 있다고 치자." 이야기는 그로부터 시작된다. 이를 믿는다면 그렇게 될 것이고, 그러지 않다면 우리는 조금 뒤로 돌아가야만 한다. 동전이 놓이기 전의 가정부터 전제하도록 하자. 동전의 형태는 어떠한가, 실로 통용되는 화폐인가? 그렇지 않다면 가상의 화폐인가? 이마저도 아니라면 이것은 어디에 쓰이게 될 것인가? 사행성 기기나 캡슐 뽑기 기계 등에만 한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플라스틱이나 알루미늄제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동전의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은 이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인가? 만약 금이나 은으로 되었다면 정체 따위는 아무래도 좋을 것이다, 동전 자체만으로도 현물적인 가치가 있으니까! 하지만 잠깐, 냉큼 집어들기 전에 조금 더 생각해보도록 하자. 주인 없는 물건에―우리는 이..
망할 새끼, 마른 입술의 거스러미를 잘근이며 으르렁인다. 다만 잇새를 비집고 새는 욕지거리란 맥없이 늘어질 뿐이어서, 후텁하고 눅진하기 짝이 없는 요 위로 별 수 없이 고개를 파묻고 만다. 애저녁에 장성한 서른 줄의 둘이 욱여 눕기엔 몹시도 비좁아 뺨이나 기대는 것조차 겨우다. 굴곡진 갈빗대가 여실한 흉곽을 더듬는 손 끝에서 익숙한 담뱃진 내가 난다. 비루먹은 망아지마냥 퍼들대는 팔을 애써 뻗어내 머리맡을 이리저리 휘젓자 텅 빈 담배곽만이 손아귀에서 구겨진다. 이 개새끼, 내가 얼마 안 남았다고 그렇, 쉬어빠진 목소리가 잔소리를 늘어놓을 기세로 힘을 얻자 놈이 넉살스레 입새를 맞춰오며 이죽인다. 멍, 다음엔 꼬리 플래그라도 달까? ...싸물어, 씨발. 징그럽게. 3년 만에 돌아온 녀석은 언제나 그랬듯이 ..
스코프 너머로 밀어닥친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흐트러진 대열의 균열 마다에서 감탄과 찬사가 터져나왔다. 잊힌 대지 위에 뿌리 내린 녹수가 창천 아래 싱그럽게 빛을 머금는다. 부드럽고 윤습한 향토를 감히 검게 더럽혀진 군홧발로 내딛는다. 무수하게 줄지은 흑색의 군집이, 청록빛 등딱지가 반질거리는 소형 비행체들이, 선홍색으로 유연한 선형 개체가, 오래 전 잃어버린 색채들로 물든 날개의 무리가. 일제히 날아오르며 기어다니고 불그스런 흙을 파헤치는 모든 행위들 에 그저 경탄만을 입에 올린다. 버림받은 우리들의 망향은 이렇듯 회생하여 이곳에 재림한다. 누군가 비로소 방독면을 풀어 내렸을 때, 마른 가지에 옮겨 붙는 불길처럼 일제히 우리를 위해 스스로를 억제한 것들을 모조리 벗어 던진 뒤에. 우리는 비강을 어..
동 터오는 새벽하늘 한 켠으로 이른 별이 아른인다. 채 흐려지지 않은 달과 샛별 사이 쪽빛의 시간, 여윈 뺨의 노인은 곤한 숨을 흘려내며 침상 위로 몸을 누인다. 간밤이 불러낸 서리가 외벽의 창이며 망원경의 렌즈까지 두텁게 내려앉아 영 짧지 못한 동안 골머리를 앓은 탓이다. 켜켜이 싸인 산맥의 봉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위치상 자주 부닥칠 수 밖에 없는 일상이지만, 소일거리로 삼기에는 해묵어가며 이곳저곳이 결리기 시작한 몸뚱이가 세월을 변명삼아 삐걱이더랬다. 창 너머 이른 새 울음의 메아리를 듣는다. 덜 닦여 덩굴손마냥 들러붙은 서릿발이 희게 어룽진 무늬 틈으로 볕살이 산개한다. 땅 위의 것들이라면 모름지기 태양을 따라 순례함이 온당하였으나 그가 어버이 섬긴 별이란 새벽녘과 초저녁에나 비추는 금성이었다. ..
멈춰 선 펜 끝에 잉크가 번진다. 불현듯 치밀어 손 끝이 식어가는 감각은 불안이라 명명된다. 기실, 데보라 크레메르는 생에 있어 단 한 번도 글을 써본 적이 없는 탓이다. 주변 이들은 그를 가리켜 활자 중독이라 입을 모았으나 기껏해야 일기장의 몇 줄이나 낱장의 편지들이 고작이다. 누구에게도 펼쳐 보인 적 없고 부치지도 못하여 아무도 읽지 못한 문장들은 언제나 서랍 한 구석에 몸을 웅크린다. 이는 현재에 이르러서도 그리 달라지지 않은 성질 중 하나였다. 항시 책장 밖 여백에 존재하며 온갖 저술을 탐식하는 자는 아이러니하게도 타자의 기억 속에서 망각으로 머물기를 바랐다. 잊을 수 없다면 잊혀지면 그만이다, 그들과 함께. 억지로 삼켜 견뎌낸 논리란 눈꺼풀과 혓바닥에 각인된 얼굴들과 이름자들에 기인한다. 다시금..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아이는 답지 않게 홀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진탕 취해있었다. 제 또래라기엔 조금 연상으로 보이던 낯선 사람에게 업혀 잠에 들었나 싶다가도 퍼뜩 고개를 들며 아무 것도 신지 않은 양 발을 까딱거렸다. 처음 보는 모습보다 제가 길러냈음에도 수년간 한 번을 보지 못한 허물없는 아이의 행동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내가 없는 곳에서는 평범하게 다른 사람들처럼 지내고 있었구나. 진심으로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그 조건에 제 부재가 전제된다는 사실을 체감하자 꼴사납게도 눈가에 열이 고이기 시작한다. 서머, 정신 차려. 서머.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어깨가 움츠러든다. 저가 아닌 제 아이의 쪽일 게 분명한데. 왜 자꾸 불러요, 선배. 얕게 키득이며 점점 더 느슨해지는 아이의 표정이란 한없..
그 방의 서랍은 언제나 잠겨있었다. 아마 그렇게 시작하는 글이었다. 딱 그 하나만이 어렴풋하게 떠오를 뿐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서랍은 어느 층의 가장 안쪽에 틀어박힌 채 항시 정갈하게 정리된 상태로 붙박혀 해묵어가는 서고 맞은 편 벽에 놓여 있었다. 1m를 조금 웃도는 정도로 키가 높은 3단 짜리 서랍이었고 흰색으로 엉성하게 페인트칠 되어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허물처럼 얇게 벗겨지기 시작했다. 함께 나이 들어 털이 엉긴 양모 카페트 중심에서 벗어난 채로 놓여있었는데, 빛바랜 둥그런 자줏빛 위로 벗겨진 페인트가 금세 눈처럼 쌓이곤 했다. 서랍치고는 화장대 다리에 쓰일 법한 완만한 곡선은 사슴발 같은 쇠받침을 굳건히 딛고 서서 튤립 봉우리를 모방하며 우아하게 오르다 포도덩굴로 여덟 개의 모서리를 ..
어디부터 잘못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이것이 ‘잘못’으로 분류되는 이유조차 납득할 수 없었다. 피험 대상의 진행 거부? 대상의 부적응은 사전에 염두하고 있던 바였다. 실험은 전제부터 강제성을 띠고 있었고 이는 대상의 의사를 전면 배제했다. 하지만 그 외의 방법으로는 성립될 수 없는 실험이었다. 그도 그럴게 그 대상이란 이미 5년 전에 사망한 자신의 손녀였으므로.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죽은 아이는 인내심과 이해심이 많았다. 소위 애늙은이라 불리는 부류에 가까워 또래들 사이에 두고 비교하자면 퍽 의젓하고 관용 있게 굴 줄 알았다. 문제가 있다면 첫 번째, 아이들은 쌍둥이로 태어났으며 두 번째, 다른 아이는 외관을 제외한 모든 면에 대해 죽은 제 자매를 전혀 닮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소리조차 제대로..
돌이켜 생각하건대, 아마 말은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발톱으로 움켜내듯 성기지만 날카로이 내뱉어지던 새된 숨소리를 기억한다. 폐부 깊이 들이켜진 공기가 내부 발화기관을 거치며 달구어지다 못해 낮게 지글거리다 송곳니 틈으로 번져 흐르던 아지랑이를 기억한다. 더없이 포악하지만 동시에 당당하기 짝이 없게 아가리를 활짝 열어젖히며 드러난 날선 치열과 그 안쪽, 어두운 목구멍보다 그 깊숙한 어딘가에서 타닥타닥 튀어 오르던 불티를 기억한다. 어느 지방의 설화에서는 그들이 죽은 자리에는 산이 생긴다더니만, 실제로 이리 마주하자 몇 겹의 고개들을 겹쳐내고도 모자랄 만치 거대한 몸뚱이에서 울려오는 모든 감각들이 재앙으로 살아 숨 쉬던 그 면면의 전부를 기억한다. 그래, 우리의 첫 대화는 생존을 앞세운 위협과 경계..
초침소리. 균일하면서도 끔찍하게 철판을 긁어낸다, 그런 착각을 현실처럼 받아들인다. 후텁한 열기에 눌러 붙은 머리 가죽은 아직 환기 되지 못해 물 먹은 솜처럼 무겁고 팽창한 뇌를 옥죈다. 아득한 와중에도 선명해가는 이명을 좇는 시선은 부산스럽다. 사실 자정을 훌쩍 넘은 시간까지 모니터를 들여 보느라 뻐근할 지경으로 굳어버린 탓에 같은 자리에서 헛돌고 있을 뿐이다. 그런 사이에도 점차 깨여가는 몸뚱이에 피가 돌자 잠시간 현기증이 겹친다. 두개골과 두피의 어느 얇은 틈 사이를 얇은 와이어로 한 땀 한 땀 꿰어낸 너른 망으로 짓눌리는 망상 따위를 부러 한다. 중첩된 통증에서 한 꺼풀이나마 멀어지기 위해서는 무신경이 필수였다. 흑백이 점멸하는 무형의 압박 속에서 한참을 허우적이다 겨우내 몸을 웅크리고, 저만치 ..